대한약사회 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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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일 농사의 교훈

작성자김사연 작성일2017.06.13 조회수5 추천수0

과일 농사의 교훈

기호일보 webmaster@kihoilbo.co.kr 2017년 06월 12일 월요일 제10면

▲ 김사연 수필가

추수가 끝난 늦가을마다 매실나무 전지(剪枝) 작업을 한다.

수확기인 6월이면 매실은 종족 번식을 위해 가지마다 날카로운 가시로 무장을 하고 잎사귀와 똑같은 녹색으로 변장한 채 농부와 숨바꼭질을 한다.

무성한 잎새를 이 잡듯 뒤져 열매를 다 땄다고 생각했는데 수확기가 끝난 7월이 되면 황색으로 변신한 매실 알들이 숨바꼭질 술래를 조롱하듯 여기저기 모습을 드러낸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서 독일군에게 살아남기 위해 장롱 서랍과 화장실 분뇨통 속에까지 몸을 숨기는 유태인 아이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노랗게 농익은 매실은 마치 살구를 연상케 한다.

노란 열매를 입에 넣는 순간 살구나무를 매실나무로 착각해 심었다며 한숨을 지을 정도다.

실제로 밭 한편에 체리와 복숭아로 알고 구입해 심은 묘목은 수년이 지난 올해 수확해 보니 모두 자두나무였고 일반 토마토 모종을 구입했는데 방울토마토가 열렸다.

훌륭한 인물로 성공하라고 공들여 키웠건만 기대와는 어긋난 길을 가버린 자녀의 모습을 지켜보는 부모의 심정이 이랬을까.

하지만 모종 판매 전문가도 신이 아닌 이상 착각을 한다.

참외 모종과 달리 오이는 5각형처럼 각이 세워져 있어 조금만 신경을 쓰면 누구라도 구분을 할 수 있다.

이런 경우 말고는 외양은 물론 향기조차 비슷한 모종을 가리기란 ‘열길 물속보다 깊은 사람 속’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영리를 목적으로 한 농사가 아니기에 350여 그루의 과수 전지 작업은 인부를 고용하지 않고 혼자서 가을부터 초봄까지 3차례에 걸쳐 한다.

전에는 작은 전지가위와 톱으로 작업을 했는데 올해는 큰아들이 장만해 준, 지렛대를 이용한, 동유럽 제품 가위를 이용해 손목만큼 굵은 가지도 톱 없이 자를 수 있었다.

과감하게 가지를 쳐버리는 이유는 매실의 수확을 줄이기 위해서다. 매실 엑기스의 효능을 예찬했던 민심은 어느 날 매실의 독성과 엑기스의 과당에 대한 방송이 나간 후 매정하게 등을 돌렸다.

하루아침에 변해 버린 세상인심으로 가격 하락은 차치하고 아예 애물단지가 되고 말았다. 권력의 햇볕을 좇다가 태양이 탄핵의 구름 속으로 사라지자 고개를 돌리는 해바라기 근성을 보는 듯해 마음이 씁쓸했다.

하지만 나는 매실 원액을 진하게 타 마신 후 위염과 대장염을 치료했기에 누가 뭐래도 그 진가를 인정하고 정성껏 키워 가까운 이웃에게 선물하고 있다.

농약을 치지 않고 봄·여름·가을마다 4천여㎡를 손수 예초기로 풀을 깎아 애써 가꾼 열매이건만 매실 꼭지를 따기 귀찮다며 성의를 외면하는 분도 가끔 있다.

밤나무 옆에 심은 앵두나무 두 그루에서 적지 않은 열매를 수확해 왔는데 작년부터 고목처럼 삭기 시작했다.

이제는 앵두 맛을 보기 힘들겠다 싶어 예초기로 베어버리려다가 혹시나 그냥 두었더니 다음 해 고목 밑동구리에서 여러 개의 잔가지들이 솟아나며 빨간 앵두를 매달기 시작했다.

몸통은 고목처럼 사라지지만 새로운 자손이 탄생해 대를 잇는 인간의 생로병사를 보는 듯해 가슴이 찡했다.

‘농사는 게으름도 한몫을 한다’는 철학도 있다.

봄에 심어야 할 감나무 묘목을 서둘러 가을에 심었더니 보온조치를 해야 한다기에 수도 파이프 보온용 스티로폼으로 잠옷을 입혀 겨울을 무사히 넘겼다.

봄이 됐으니 별일 없겠지 여기고 서둘러 스티로폼을 벗기는 데 예상치 못한 5월 한파가 들이닥쳐 130그루의 묘목 중 5그루만 남고 모두 동사하고 말았다.

며칠만 더 게으름을 피웠더라면 감나무 묘목의 95%가 동사하는 변고를 겪지 않았을 것이라 후회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예년처럼 퇴비만 뿌려도 충분한데 더 큰 열매를 수확하려는 과욕 때문에 비료를 많이 준 탓으로 작년엔 수박과 참외 모종이 거의 말라 죽었다.

올 3월부터 농사 준비를 하며 묘목을 심었던 자리의 비료 성분이 남았을 흙을 파내고 퇴비를 섞는 객토 작업을 한 후 5월 중순께 각종 과일 채소를 심었다.

봄 가뭄 때문에 20일간 하루 3시간씩 새벽시간에, 어느 땐 밤 9시까지 지하수를 줬건만 유독 30그루의 수박은 5그루만 멀쩡하고 나머지는 작년처럼 고사했다.

과욕이 빚어낸 참혹한 응징에 한동안 말을 잊고 밭두렁에 주저앉아 자식 여읜 심정으로 말라붙은 수박 줄기를 응시하다 날이 어둑해서야 귀가했다.

농작물은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지만 농사는 내 인생의 스승임에 틀림없다.